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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송창식 나이 프로필 부인 가족 아내 자녀 근황 쎄시봉 고향 노래모음

by 얼굴은나의무기 2024. 6. 15.

 

 

송창식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로, 한국적 정서를 깊이 살린 음악적 스타일과 개성 있는 가창력을 선보이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전성기 시절 상당한 퀄리티의 시대를 앞서간 노래들을 선보였는데, 매우 많은 그의 노래들 대부분이 송창식 본인이 직접 자작곡한 노래들이다. 당시 1960~90년대 한국 가요계에서 단 한 명의 천재를 꼽는다면 작사와 작곡은 '송창식'이라고 꼽을 만큼 레전드이며, 은근히 서로 자존심이 강한 쎄시봉 멤버들 조차도 송창식의 음악적 천재성은 인정하고 칭송할 정도다.

 

 

 

 

송창식 프로필

 

나이 : 1947년 2월 22일 출생. 77세

고향 :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가족 : 부인 한성숙, 자녀 딸 송무늬 아들 장남 송결 차남 송빛터

학력 : 인천신흥국민학교 졸업 - 인천중학교 졸업 -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 졸업

신체 : 키 164센치

군대 : 육군 병장 만기 제대

데뷔 : 1968년 트윈폴리오 '하얀 손수건'

 

 

 

 

송창식은 2024년 2월 15일 방영한 <박원숙의 같이삽시다>에 출연하여 최근 근황을 전했다. 박원숙을 비롯한 자매들을 만난 송창식은 "이제 혼자 기타치고 노래를 하며 공연하기가 힘이 든다. 손이 느려졌고, 매일 연습을 하는데 수전증이 있어 기타를 치는 것이 특히 힘들다"라고 밝혔다. 이어 "가수로 누리는 생활은 큰 감흥이 없다. 얼마나 인기가 있고 부가 있는지 상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노래를 만들지를 고민했다. 나중에 고집스러워져서 음악 활동에 소홀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녀에 대해서 털어놨는데, "총 세 아이가 있다. 세 아이 중에 두 아이를 입양했고, 아내의 쌍둥이 언니가 미국에서 낳은 아이를 데려왔다"라며 "미국에서 불법 인공 수정을 해서 아이를 낳았더라"라고 밝혔다. 이어 "처형이 입양하려고 했던 둘째 아이는 미국에 보내기 전에 잠시 맡아 기른것이다. 그런데 법이 바뀌어 입양을 못 보내서 우리가 키우게 됐다. 이후 처형이 미국에서 불법 인공 수정으로 아이를 낳았다. 우리가 미국에 가서 처형이 낳은 아이를 안았는데 안 떨어지더라, 그래서 우리가 데려오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또한 송창식은 영화 <헤어질 결심> OST인 '안개'를 정훈희와 부르게 된 일화를 공개했는데, "정훈희가 녹음을 하자고 박찬욱 감독을 데리고 왔는데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다. 녹음할 때 정말 짜증났다. 내가 노래를 잘못해서 듀엣을 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엔딩에 쓰일 줄 몰랐는데 정말 좋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노래를 부를 때 한 번도 똑같이 부른 적이 없다"라면서 '사랑이야'를 비롯해 히트곡을 연이어 열창을 선보여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1967년 윤형주와 같이 트윈폴리오를 결성한 뒤 이듬해인 1968년 1집 앨범 '하얀 손수건'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따. 또 이듬해인 1969년 영화 <푸른 사과>의 조연을 통해 영화배우로도 나섰으며, 1971년에는 '창밖에는 비 오고요'를 발표하며 솔로 가수로 전향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74년 '피리 부는 사나이' 곡으로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1975년 '한 번쯤', '왜 불러' 곡으로 연이어 히트를 시키면서 가요 부문의 여러가지 상을 수상하면서 한동안 가요계를 장악해나갔다. 1978년 한일 문화교류협회 초청으로 일본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또 같은 해부터 연속 3년 동안 계속해서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이 당시에 발매한 곡으로는 '사랑이야', '토함산', '나의 기타 이야기' 등을 내놓았다. 1980년에는 '가나다라' 노래로 가요계에 국악을 접목하는 시도를 보여주었고, 1986년 발표된 '참새의 하루', '담배가게 아가씨'를 더블 타이틀로 한 앨범 이후에는 새로운 곡을 발표하고 있지 않다.

 

 

 

 

송창식 가수는 특유의 대충 부르는 듯한 창법과 절대로 따라부르는 것이 쉽다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며 노래를 부르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흉내만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 아닌게아니라 음악으로 득도한 천재라고 할 수 있고, 막말도 잘 하며 노래에 자부심이 강한 조영남도 노래에 대해 전혀 태클을 걸지 못했다고 할 만큼 인정받는 인물읻. 실제 윤형주에게는 염소 목소리 비슷하다고 가수를 하지 말라며 디스를 보내기도 했지만 송창식을 향해서는 적어도 공개적으로 단 한차례도 디스한 적이 없다.

 

 

 

 

과거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 프로그램에서 쎄시봉 특집에 출연해 변치 않는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송창식은 입을 열 때마다 유재석이 진심으로 감격하는 모습이 보일 정도, 프로그램에서 CM송을 딱 하나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빙그레 투게더 이후에 참붕어빵도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조영남의 증언에 따르면 노숙자도 아니고, 아주 남루한 사람이 다 뜯어진 기태를 가지고 들어와서는 클래식 가곡을 환상적으로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 트윈 폴리오 시절까지만 해도 번안곡을 부르는 가수였던 송착식이 본격적으로 작곡을 결심한 계기는 김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70년 솔로가수로 독립하여 창작곡 '창 밖에 비오고요'를 내놓았지만 본인의 표현으로는 욕 먹지 않을 정도의 노래여서 앨범에 한 번 실은 거였다고 한다. 김민기가 1971년 '아침 이슬'을 비롯하여 전체를 자신의 자작곡으로 채운 자신의 1집 앨범 '아하 누가 그렇게'를 발매했을 때, 송창식은 그 앨범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본격적으로 싱어송라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당시부터 김민기와는 친분이 두터워지게 되면서 이후 두 사람은 공동으로 만든 두번째 앨범과 초기의 최대 걸적인 '나그네' 등의 명반이 탄생하게 되었다.

 

 

 

 

조영남이 밝히기를 본인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날이면 가장 성대하게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람이 송창식 부부라고 한다. 가수로서 많은 인기를 구가하던 송창식이 어느날에 단칸방으로 된 좁은 작업실에서 겨우 지내는 모습으로 본인을 머쓱하게 맞이했다고 하며, 와이프가 사업으로 인해 송창식의 돈을 다 한 방이 날리자, "다시 벌면 되지 뭐.." 라며 답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송창식이 평소 돈에 대한 신념, 생각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송창식 노래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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