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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

이봉주 건강 나이 희귀병 프로필 결혼 부인 아들 자녀 군대

by 얼굴은나의무기 202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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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마라톤 선수 이봉주는 1996년 제26회 애틀란타 올림픽인 마라톤 종목에서 은메달을 땄고, 2년 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 또 다시 3년 뒤 2001년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에서도 1위 우승을 차지하면서 황영조를 잇는 대한민국 최고의 마라토너로 명성을 쌓았다. 한편 최근 <알토란>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전 최근 건강을 되찾은 모습을 공개해 반가운 소식이 전하기도 했다. 2021년 즈음,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 찾아와 점점 허리가 굽어지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에게 큰 걱정과 안타까움을 전했다. 하지만 수술 및 치료를 통해 다시 예전의 건강한 이봉주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봉주 프로필

 

나이 : 1970년 11월 8일 출생. 만 53세

고향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소우리

가족 : 어머니, 부인 김미순, 자녀 큰 아들, 작은 아들(유전자 혁명 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들이 상당히 잘생겼다)

학력 : 성거초등학교 졸업 - 천성중학교 졸업 - 천안농업고등학교 전학 - 광천고등학교 졸업 - 서울시립대학교 정경대학 무역학 학사

현 거주지 : 경기도화성시 반월동

소속 : 런 코리아

종교 : 불교

신체 : 164.6센치, 62키로

혈액형 : A형

 

 

 

 

이봉주 전 마라톤 선수는 2020년 1월부터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2021년, '근육긴장이상증' 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았다. 이 질환은 근육 수축과 긴장을 조율하는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근육이 굳어 몸이 비틀어지는 증상이 찾아오는 질환이다. 이 질환으로 인해 이봉주는 등이 굽고 목이 앞으로 나오는 등 증상을 보여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처음 이러한 증상이 찾아올때는 <뭉쳐야 찬다> 예능프로그램을 한창 하고 있었을 때인데, 당시 병이 생긴 원인을 몰랐고, 왜 아픈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서서히 배가 딱딱해지면서 굳어져가는 느낌이 들었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앞으로 구부러져 원인도 모른채 계속 상태가 악화되어 갔다며 전했다.

 

 

 

 

결국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심지어 점집, 스님에게도 찾아가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질환에 대해 아는 것과 치료법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병원에서 척추 쪽 낭종이 있는 것을 발견, 6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에 낭종을 제거하였고 이 후 상태가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4년 1월 이후로부터는 의자에 허리를 쫙 핀채 뉴스에 나와 인터뷰를 하는 등 건강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거의 돌아갔으며 곧 더욱 꾸준한 재활 치료를 통해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 올 것이라 전했다. 그리고 힘든 투병 기간 동안에 옆에서 잘 지켜주고 챙겨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봉주 그의 마라토너 인생을 살펴보면 광천고등학교 1학년 시절, 육상 장거리 선수로 첫 입문을 하였다. 1990년에는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하여 준우승을 기록했고, 이듬해 전국체육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마라톤의 대부 정봉수 감독에게 눈에 띄어 코오롱 사단으로 합류하게 되고, 또 이듬해인 1992년, 1월 도쿄 국제 하프마라톤 대회에서 한국 최고 기록을 세우며 4위로 골인, 이후 서서히 국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나, 같은 해인 열린 바르셀로나 올림픽 선발전에서 레이스 중간에 부상을 당해 포기하고 만다.

 

 

 

 

1993년에는 전국체전에서 또 다시 우승을 차지했고, 12월에 열린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세계적인 선수로서 경쟁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아쉽게 2등인 은메달을 차지했으며, 이때부터 황영조를 잇는 대한민국 최고의 마라토너로 등극한다. 이때 금메달을 딴 선수와 단 3초 차이 격차를 기록했는데 이 차이는 역대 올림픽 마라톤 사상 1, 2위 최소 격차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같은 해에 열린 일본 후루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고, 1998년엔 4월에 열린 로테르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 기록을 다시 세웠지만 아쉽게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또 같은 해에 열렸던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1위 금메달을 차지하였으며 이듬해 1999년에는 정봉수 감독과의 갈등, 코오롱 사단의 부당한 처우에 반발을 하면서 소속팀도 탈퇴하고 은퇴설까지 등장하게 된다. 그렇게 2000년이 되어서는 무소속으로 도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 최고 기록을 세웠지만, 같은 해에 열린 시드니 올림픽에서 큰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를 받았지만 레이스 도중 다른 선수와 충돌하는 바람에 메달권 안에는 들지 못한채 대회를 마감했다.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하면서 지난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아쉬움을 달래며 극복했다. 그리고 이듬 해인 2002년에는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하여 아시안 게임 마라톤 2연패를 달성했지만 당시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선수 커리어에 큰 비상이 찾아온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부상 치료 및 휴식을 가졌던 이봉주는 2007년, 동아일보가 주관하는 서울 국제 마라톤에서 역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왕의 귀환을 알렸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릭픽에서는 또 다시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아쉽게도 순위권에서 크게 밀린 채 마지막 올림픽 도전을 마감하게 됐다.

 

 

 

 

마지막 올림픽에서 아쉬운 성적을 기록한 이봉주는 다시 2009년에 열린 전국체전에서 1위로 우승을 차지하여 유종의 미를 장식한 채 긴 마라톤 선수의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 그렇게 만 39세의 나이로 은퇴한 이봉주는 총 41번의 완주를 마친 대한민국 마라톤계의 산 증인이자 레전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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