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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송대관 나이 프로필 아내 가족 자녀 부인 근황 얼굴 건강 고향 노래모음

by 얼굴은나의무기 2024. 6. 20.

 

 

가수 송대관은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4대 트로트 가수 천왕으로 꼽히며, 1975년 발표한 '해뜰날'이 크게 히트를 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차표 한 장', '우리 순이', '고향이 남쪽 이랬지', '네 박자' 등 입에 착착 붙는 가사와 저절로 흥을 돋구는 멜로디의 많은 히트곡들을 발표하며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최근 근황에 있어서 예전 아내와 관련된 논란과 고액의 빚으로 인해 마음의 고생을 심하게 한 듯한 수척해진 얼굴로 건강이상설까지 떠돌아 많은 주위 사람들과 팬들의 근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송대관 프로필

 

나이 : 1946년 6월 2일 출생. 78세

고향 : 전라북도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가족 : 아내 이정심(1953년생. 1977년 결혼), 자녀 첫째 아들 송진형 둘째 아들 송진석

학력 : 태인초등학교 졸업 - 전주서중학교 졸업 - 전주영생고등학교 졸업

신체 : 키 165센치, 체중 67키로

혈액형 : B형

데뷔 : 1967년 '인정많은 아저씨'

종교 : 개신교

 

 

 

 

송대관은 전북 정읍시 태인면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배우 박근형과는 동향인으로서 30년이 넘도록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처음 가수가 된 계기로는 당시 전북 전주시에서 살고 있던 집에서 나와 기차를 타고 홀로 서울로 상경 중에 가수 김상희의 남편인 류훈군 씨를 소개받아 KBS 방송국에 들어갔다. 당시 류훈근은 KBS PD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그의 소개로 때마침 KBS에서 트로트 가수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 때부터 가수로서 데뷔하게 되었다.

 

 

 

 

영원한 라이벌이자 절친 사이로 알려진 가수 태진아와는 실제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절친한 관계에 가까우며, 예전에는 같이 잇몸약 CF 광고에도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특히 함께 방송이라도 출연하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을 주곤 하는데, 송대관이 먼저 "태진아는 내 보조가수야!"라고 한 마디 하면 태진아는 주로 헛웃음을 짓으며 반격하는 꽁트 아닌 꽁트 상황을 연출한다. 물론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다들 웃고 넘길만큼 두 사람의 친분을 의심하지 않으며, 실제로 송대관과 태진아는 부인한테도 빌려주지 않는다는 차를 빌려주기도 하며, 서로 최고급 무대용 의상을 빌려 입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듯 겉으로는 서로 못잡아 먹어 티격태격하지만 실제로는 찐우정이 넘치는 사이다.

 

 

 

 

과거 송대관은 가수로 데뷔하고도 무명 생활을 길게하였는데, 1975년에 발매한 신곡 '해뜰날'이 대박을 치면서 첫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많은 상을 수상하면서 그해 가수왕까지 차지한 송대관은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우연히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고서 "그래 노래는 이렇게 흥이 나야지!"하며 좋아했다는 썰이 있다. 또 실제로 그 시절 수도권의 한 공군 헌병부대에서는 마치 군가마냥 하루 종일 '해뜰날'만 틀기도 했다고 한다.

 

 

 

 

'해뜰날' 곡으로 최고 트롯가수로 떠오른 송대관은 이후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한동안 가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1989년 '혼자랍니다' 곡으로 다시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후 '정 때문에', '차표 한 장', '큰 소리 뻥뻥', '고향이 남쪽이랬지' 등의 여러 많은 노래들을 연이어 히트시켰으며 이 때부터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가수 4대 천왕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네 사람이 각각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대표하는 트로트 가수라는 점인데, 태진아는 충청도, 송대관은 전라도, 설운도와 현철은 경상도 출신이다. 그리고 이후에 내놓은 '네박자', '유행가' 노래도 대히트를 치면서 국민 가수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편 송대관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인 송영근 씨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6일 정읍군 태인면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당시 김현곤, 송수련, 박지선 등 여러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읜한 뒤,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 수천장을 등사해서 모인 상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이들과 같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이후 일본 경찰들에게 체포되었고, 최종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는 정읍시 인근에서 은거하며 지내다가 1942년 6월 11일 향년 46세의 이른 나이에 별세하였다.

 

 

 

 

송대관의 부인이 2009년에 마카오 원정도박을 한 혐의로 2011년 기소되어 벌금형을 선고 받았는데, 당시 집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가 연체된 금액만 10억원. 이 외에도 여러 빚을 모두 합하면 160억원 정도에 이르렀다고 방송에 출연해 고백했다. 그리고 그 또한 캐나다 교포 A씨로부터 4억원대 토지 분양권을 불법으로 가로챈 사기 혐의가 존재해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으며, 이후 서울 서부지법은 송대관에게 징역 1년 2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송대관의 아내에게는 징역 2년을 선고하였다.

 

 

 

 

당시 살고 있던 서울 용산구 이태원 지역의 매매가 33억원 집과 6억원짜리 화성시 토지까지 경매로 넘기고도 160억원의 빚을 다 해결하지 못하여 결국 법원에 회생 신청까지 한 송대관. 한편 라이벌이자 절친 태진아가 이 무렵에 연예 사업으로 대박을 치며 건물까지 사서 건물주가 된 행보를 이어가 서로 큰 대비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송대관은 2014년 12월 SBS를 제외한 KBS, MBC에서 출연정지 자격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인 2015년 1월 2일, 송대관의 아내는 보석금으로 석방이 되었고, 송대관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끝까지 항소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끝내 2015년 8월 13일 항소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자신의 사기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한 방송에 출연해서 직접 밝히기를, 약 160억원의 빚 가운데 90%를 갚았고 은행 대출로 지낼만한 새 집도 장만했다고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 그렇게 지난 몇년 동안 조그마한 무대도 가리는 거 없이 모두 올라 뛰었고, 차에서 쪽잠을 자가면서 김밥으로 간단히 허기를 채우는 등 성실히 빚을 갚아나갔다고 한다.

 

 

 

 

송대관 노래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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