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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박사 가족 이화여대 동상 친일파 낙랑클럽 이화인 이대 성상납

by 얼굴은나의무기 2024. 4. 9.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수원시 정 후보의 이화여대 성상남 막말 파문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기사 보도에 따르면 김준혁 후보는 우선 사과를 올렸지만 사과 당일까지 자신의 발언이 학문적인 근거가 있다면서 항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실제 그가 제시한 근거 논문을 살펴보면 성상납을 시켰다는 증거기록 및 명백한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고 전했다. 또한 학자 시절에는 김용민TV 유튜브에 출연하여 김활란 여사의 친일 행적을 언급하면서 돌연 "김활란 여사가 미군정 시대에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군 장교들한테 성상납을 시키려고 그랬잖아"라고 말하였다.

 

 

 

 

이에, 근거없이 막말이나 하고 당장 사퇴하라며 비판이 불거지자 김준혁 후보는 반박에 나서게 되었는데 지난 2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제가 5~6년 전에 유튜브에 출연하여 나누었던 발언을 꼬투리 삼아 앞뒤 다 자르고 성(性)과 관련된 자극적인 부분만 편집해서 저와 민주당 전체를 매도하고 있다"며 자신의 주장을 두고 "친일인사들의 문제가 되는 행적,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성착취를 강요했던 숨겨진,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라면서 반박에 나섰다.

 

 

 

 

한편 이화여대의 총동창회, 이대 출신의 이화인 인사들이 김준혁 후보의 즉각 사퇴와 사죄를 촉구하였고,이들은 성명을 통해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은 김준혁 후보가 한 김활란, 낙랑클럽 발언을 문제 삼아 정치적 공세이 열을 올리고 있다면서 국민의힘 한동훈 위원은 사전투표를 이대 앞에서 하는 쇼까지 보여주었다. 이대를 정쟁의 소재로 이용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며 큰소리를 남겼다. 이어 김준혁 후보가 검증되지 않은 자료와 억측으로 본교, 이화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애 대해서 엄중히 법적 대응을 할 방침이라며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이들은 해방 후 김활란은 모윤숙과 함께 낙랑클럽을 만들어 한국 여성들이 미국 고위 관료와 미군장교들을 접대하도록 했다면서 그럼에도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라며 불려지고 여성 선각자인 것 마냥 포장되어 있다고 비판, 또한 현재 이화여대 정문 앞에 세워진 김활란의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김활란, 그는 누구인가

 

출생 : 1899년 2월 27일

사망 : 1970년 2월 10일. 향년 70세

고향 : 경기도 인천부(현 인천광역시)

가족 : 아버지 김진연, 어머니 박도라, 3남 5녀 중 막내

학력 : 이화학당 고등과 졸업 -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학사 - 보스턴 대학교 철학과 석사 - 컬럼비아 대학교 철학과 박사

약려 : 초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제2대 공보처 차장, 제3대 공보처장

 

 

 

 

1899년 2월 27일인 18세기에 태어난 김활란은 현재 지명으로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나, 집안 자체가 개신교인으로 상당히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영향 때문에 7세 때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았으며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고 불렸고, 이후 이름이 김활란이 되었다. 1907년, 인천 영화학당에 입학, 이듬해 1908년에는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 이화학당 고등과로 옮겨 다녔는데 이때 유관순 열사가 후배였다고 알려져 있다.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1922년 조선감리회 감독이었던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로 입학하여 1925년 6월에 졸업, 1925년 10월에는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이듬해 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0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 10월에는 

조선의 부흥을 위한 농촌 계몽'이라는 논문을 써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덴마크 여행을 다녀온 다음 "덴마크의 방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농촌 계몽을 하자는 내용의 '정말인'의 경제 부흥론"이라는 논문을 써 1931년 6월 발표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엔 1918년 3월, 이화학당 졸업 직후부터 이화학당 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중인 시기에 3.1 운동일 일어나자 비밀 결사에 참여하였는데 찬송가 345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때" 곡이 3.1 운동이 이러난 직후 직접 작사한 노래다. 1920년 6월에는 '이화 전도대'를 결성하여 전국을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하였으며 1922년 4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에 김필례와 같이 조선 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그리고 1923년 3월, 김필례와 유각경 들과 같이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창설, 이후 귀국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 활동을 1930년 6월까지 하였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황제가 사망하자 조선총독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고자 단체로 며어서 망곡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화학당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김활란은 미국인 선교사 출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과 부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화학당의 전체 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입게 한 후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하도록 했는데 결국 주동자로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고 만다.

 

 

 

 

1932년 9월~1939년 7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사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맡았으며, 1935년 11월에는 잠시 교장 대리를 맡기도 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에 올랐고, 1942년에는 사위 조석봉과 함께 동구여학교를 세웠으며 이때까지는 여러 업적을 이룬 위인의 행보를 보여주었다고 볼수 있다.

 

 

 

 

1936년 이후 김활란 박사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되기 시작하는데 '아마기 카츠란'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당시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창씨 개명에 동참하면서 1936년 말부터는 갑자기 교육과 여성 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에는 거의 대부분 자진 참석을 하였고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없이 작성했는가 하면 조선과 일본의 내선일체 찬양글도 많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8년의 윤치호 일기를 확인해보면 윤치호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앴고 있다는 것에 김활란이 화를 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이때 김활란은 얼마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질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김활란과 함께 친일행적을 보여왔던 여성계 지도자들은 훗날 자유당의 이기붕 아내 박마리아, 그리고 모윤숙과 노천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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